할     랑

 죽은 자들의 생명은 질겼다.
 모순적인 말이지만 현실이 그랬다. 쇠 지렛대로 아무리 내리쳐도, 머리를 완전히 터트리지 않는 이상은 그들을 무력 시킬 수 없었다. 거기다 김일하는 홀몸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언니가 함께하고 있었다. 김선하. 검은 머리에 금색 눈을 지닌 저와 달리 선하는 은빛 머리에 보라색 눈을 지녔다. 생긴 것도 성격도 정반대였는지라 주변 사람들은 말하기 전까지 둘이 자매인 것을 모르곤 했다. 그래. 그랬지… 김일하는 이제는 기억해내기도 힘든 시절을 겨우 떠올리며 눈앞에 있는 좀비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륵….”

 좀비 소리가 들렸다. 제가 흠씬 두들겨 팬 좀비가 낸 소리라기엔 그는 이미 머리가 완전히 터져 미동도 없었다. 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일하는 건조한 눈으로 눈 밑까지 감긴 선하의 목도리를 내리고 뺨을 쓰다듬었다. 피부는 차갑고 거칠어서 추운 날씨에 갈라지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뺨을 슥슥 쓸어낸 일하가 상냥하게 물었다.

“언니. 배고파?”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일하가 미소 지으며 선하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주저앉은 채로 입만 뻥긋거리며 덜덜 떠는 남자가 있었다. 일하는 생각했다. 저 사람이랑 죽은 자들은 다른 점이 뭘까. 움직이는 죽은 자와 완전히 죽은 자의 차이가 뭘까. 저 사람은 과연 죽은 자들과 무엇이 달랐기에, 선하는 죽어야 했고 이 자는 살아있는 것인가.

“사, 살려. 살려주세요…. 우, 우리… 같은 사람이잖아. 근데 나한테 왜 이래, 씨발!”

 일하는 선하의 ‘식사’를 위해 생존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간만에 찾은 뒤탈 없는 생존자였다. 혼자 살아서 죽어도 아무도 모르는. 일하는 타고난 붙임성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사람을 못 본 지 오래된 그는 화색 하며 일하를 반겼다. 겨우 구한 것이라며 옥수수 통조림까지 까서 건넸다. 일하는 그것을 먹는 척했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를 쇠 지렛대로 후리고 입에 그 근육이완제가 타진 옥수수를 탈탈 털어줬다. 약발이 아직 돌지 않은 남자가 소란을 피워대는 게 여간 짜증 나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 같은 사람이라면서 그따위 약을 타?”

 일하는 웃으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남자의 다리를 툭툭 쳤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좋겠다 싶을 정도로 광기 어린 소름이 끼치는 미소였다.

“언니한테 너 같은 쓰레기 먹이는 것도 미안하다고.”
“그으….”
“아이구 우리 언니… 미안 미안. 불편했지?”

 일하는 선하의 목도리를 푸르고 털모자를 벗겼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입마개가 드러났다. 패딩 주머니에 줄곧 넣고 있는 줄 알았던 손은 사실 그 사이에 구멍을 뚫어 쇠사슬로 단단히 묶여있던 것이었다. 창백한 피부에 푸석한 은색 머리칼, 탁한 자안. 아직 완전히 의식이 날아간 정도는 아닌 것인지, 혹은 일하가 생전 선하의 모습에 그를 투영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의식도 없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줄만 알았던 시선이 똑바로 남자에게 향했다.

 남자는 순간 소변을 지릴 뻔했다. 분명 좀비인데. 아무 감정도 들어있지 말아야 할 눈에서 얼핏 분노가 엿보인 것 같아서. 일하의 바로 옆에 서 있으면서도 그는 일하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상했다. 분명 ‘죽은 자’라면, 지성을 잃어버린 지성체라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달려들어야 했다. 그게 그간 봐온 그들의 본능이었다. 일하가 얼굴에 쇠사슬로 감은 입마개를 벗겨낼 때도 선하의 눈 안엔 오로지 겁에 질린 남자만 담겨있었다. 몸을 죄고 있던 것이 없어지자 선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바라보는 일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다고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봐야만 했다. 제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그동안 무슨 짓을 해왔는지.

 소리지르며 발버둥 치던 남자는 머지않아 사지가 축 처져 미동도 하지 않았고, 집안에선 선하가 게걸스레 살점을 뜯고 고기를 씹는 소리만 들렸다.


 식사를 마친 선하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움직이는 시체들은 꼭 이랬다. 배가 차 있거나 쫓아다닐 표적이 없으면 꼭 이렇게 가만히 있었다. 허기를 느낀다는 점은 ‘살아있는 죽은 자’라는 호칭처럼 모순적이었다. 일하는 선하의 팔을 잡아당겼고 선하는 그에 따라갔다. 따라갔다기보단 주어진 자극에 수용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했다. 피와 살점이 잔뜩 붙은 선하의 입가를 물 묻힌 수건으로 꼼꼼하게 닦아주고 풀러뒀던 입마개를 다시 채웠다. 선하의 시선은 여전했다. 일하는 한숨을 푹 쉬고 시체가 된 남자의 머리를 시체로 되살아나기 전에 미리 으깼다. 선하의 배를 채웠으니 이젠 제가 채울 차례였다. 사람이라는 게, 이 지경이 되고도 배는 여전히 고프다. 좀비와 산 사람의 차이가 대체 무언가? 일하는 멀쩡한 옥수수캔을 따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신선한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

 남자의 집은 거처로서는 꽤 쓸만했다. 선하가 남긴 시체를 소분하고 일하는 제 몫의 식량을 따로 챙겼다. 오랜만에 따듯한 물로 선하의 몸을 씻기고 제 몸도 씻은 후 침대에 편히 누우니 잠이 몰려왔다. 최대한 조심하고자 했지만 근방에 제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좀비를 데리고 다니는 생존자라고. 생존자를 죽여 좀비에게 먹이로 주는 미친 사람이 있다고. 다행히 겨울이었기에 선하를 꽁꽁 싸매는 것으로 어느 정도 감출 수는 있었으나 역시 같이 다니기엔 위험이 컸다. 사람도 조심해야 하고 좀비도 조심해야 하는 입장에서 여유는 사치였다. 덕분에 변태 히키코모리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주변 좀비도 정리됐으니 당분간은 머물러도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만 잠들어버렸나보다.

 꾸고 싶지 않은 꿈도 꿔버렸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 선하가 살아있고, 가족들도 살아있을 때의 꿈이었다. 너무 생생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이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선하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별거 아닌 일에도 밝게 웃었다. 제가 짓궂은 장난을 치면 화내기도 했다. 이렇게나 표정이 다양한 사람이었구나. 이렇게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감정이 벅차올라서 일하는 선하를 끌어안고 울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서. 무엇이 미안한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사과했다. 언니의 머리를 끌어안고, 외부 자극에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르…….”

 얼마나 잔 거지. 눈을 떠보니 10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온 선하가 입마개로 일하의 어깨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좀비란 자고로 잡고 깨물어대는 존재였으나 묶여있었기에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일하는 아까의 꿈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든 것에 싫증이 났다. 눈물을 흘릴 정도의 인간성이 남아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런 꿈을 꿔서 그런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눈물이 펑펑 나왔다. 일하는 선하를 확 밀쳐냈다.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진 선하는 다시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일하에게 다가왔다. 그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면서 일하가 역정 냈다.

“벌써 배고파?”
“언니는 왜 계속 배고파?”
“그만 좀 하자 제발.”

 끝내는 애원하며 매달렸지만 선하는 묶인 손을 달싹거리며 일하를 잡아먹기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일하는 눈물을 흘리다 실소했다. 그치. 이건 벌이나 다름없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고, 죽어있는 사람을 또 죽인 벌. 죽은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산 사람을 바쳤으니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다.

“이제 그냥 돌아오면 안될까?”

 하지만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이기적이었다. 항상 선하가 먹는 게 더 커 보였고, 선하가 하는 게 더 좋아 보였다. 혼나는 일이 있을 땐 항상 억울하기만 했다. 어릴 때 떼쓰던 모습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새 일하는 저도 모르게 선하를 찍어누르고 있었다. 밑에 깔린 선하는 메마른 시선으로 일하를 바라보는 듯 보지 않았다.

“언니…?”

 일하는 제 눈을 부볐다. 순간 선하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여서. 제 눈물이 절묘한 위치에 떨어진 거였을 확률이 높았지만 그냥 선하가 흘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울기는 왜 울어.”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일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냉장고로 터덜터덜 걸어가 소분해둔 식사를 선하에게 던져주고 일하는 방구석으로 가서 털썩 앉아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입마개를 찬 선하가 고깃덩어리를 씹으려 끙끙거렸지만 일하는 제 슬픔을 달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건 그러니까, 작은 투정이었다.

 깨어있는 지 몇 시간이 되었더라. 적어도 하루 이상은 지났을 것이다. 추적자들에게 거처를 들킨 일하는 식량도 챙기지 못하고 선하만 데리고 그곳을 나와야 했다. 저야 조금 지치고 고통스러우면 그만이었지만, 선하는? 더욱 시체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저에게 달려들었다. 다소 신경질적인 선하를 보며 화는 낼 줄 아는구나, 남 일처럼 생각했다.

“이렇게 사는 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아있는 자들한테도 적이고 죽은 자들에게도 적이라면, 난 대체 뭘까. 극한에 몰린 상황이라 그런지 그런 생각이 괜히 더 났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선하랑 함께하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선하도 저를 공격하고 있지 않는가. 이건 함께하는 게 아니었으며 선하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일하는 선하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목도리를 내려 입마개를 벗기고, 손목을 칭칭 감고 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그리고 도망쳤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달렸다. 선하의 모습을 한 좀비는 따라오지 않은 것 같았다. 굶겨서 달릴 힘도 없어진 것인지, 그 정도의 지능도 없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이제 일하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도망치다보면 어느새 왕복 8차선의 대로가 보였다. 탁 트인 곳이라 사람한테든 좀비한테든 공격 당하기 좋았다. 죽기에도 딱 좋은 곳이었다. 일하는 말갛게 웃으며 대로 한가운데에 누웠다.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도 솔솔 불었다. 대도시였던 곳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끝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가 신발이 질질 끌리는 익숙한 소리에 다시 떴다. 선하가 이쪽으로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그치. 이 주변엔 사람도 좀비도 없었다. 그러니 선하가 배고파서 저를 따라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선하는 털퍽 주저앉더니 은신처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하의 몸 위로 기어 올라왔다. 이젠 쇠사슬도 입마개도 없다. 드디어 죽겠구나. 이대로 좀비가 되면 나름대로 선하와 함께하는 거 아닐까. 차라리 저번의 그 꿈이라도 꾸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하는 다시 눈을 감았다.

“…?”

 하지만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하는 그저 가만히 일하를 보고 있었다. 침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잘 때 어깨를 갉아먹으려 했던 것과 같은 자세로 있으면서, 식사를 안 한 지도 오래됐으면서, 입마개와 쇠사슬도 없으면서. 일하를 깨물거나 할퀴려 하지 않았다.

“언니…?”

 몸상태가 온전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선하의 눈이 유달리 촉촉해 보였다. 눈물이 맺혀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건 절대 죽은 자의 눈빛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만져지는 것은 여전히 차갑고 푸석한 살인데도 마치… 선하가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자기는 죽어있으면서 살아달라고, 살아달라고. 그렇게 끊임없이 일하에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 얼마나 마주 보고 있었을까. 선하가 정말 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살짝 열었다.

 선하의 얼굴 천천히 줌인하며 끝난다.


세 장면을 연달아서 봤는데, 다들 어떠셨나요?

 진수빈(감독): 저는 개인적으로 첫 번째 장면을 정말 좋아해요.
 안인혜(김선하 役): 저거 원래는 마지막에 일하가 바로 선하의 구속구를 벗기는 거거든요. 다가간 건 애드리브였는데 릴파가 잘 받아줬죠.
 릴파(김일하 役): 사실 저 장면이 끝나고 나서야 인혜 언니가 애드리브 했다는 걸 알았어요. 그 정도로 그 장면에 몰입하고 있었죠. 주하리 작가님의 각본도 정말 흡입력 있지만, 인혜 언니의 연기는 저를 정말 ‘김일하’로 만들어요.
 안인혜(김선하 役): 저도 너무 몰입한 나머지 릴파가 이 작품이 배우로서는 처음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만 거예요.(웃음) 해놓고 아차 싶었는데 깜짝 놀랐어요. 연기가 처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어요.
 진수빈(감독): 여기서 일하가 선하를 놓지 못하는 이유를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저 눈빛을 보세요. ‘죽은 자’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고 선하가 산 자도 아니에요. 영화에선 일하가 선하한테 공격 받는 장면이 자주 나와요. 두 번째 장면에서처럼요. 구속구가 많아진 것도 다 그런 일들이 있어서인데… 선하는 여전히, 끊임없이 달려들잖아요. 그 모습은 일하가 쓰러뜨린 수많은 ‘죽은 자’들과 똑같아요. 마냥 그러기만 했다면 일하가 지금까지 데리고 다니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저 눈빛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릴파(김일하 役): 인혜 언니가 정말 대단한 게, 눈빛만으로 연기를 해야 하잖아요. 진 감독님은 언니한테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를 보여달라고 하셨는데 저한테 하라고 하셨으면 멘붕 제대로 왔을 것 같거든요.(웃음)
 안인혜(김선하 役): 저는 여기서 릴파의 표정도 좋아해요. 괴로운데 웃는 것 같고, 웃고 있는데 슬프고 화나는 것 같은 표정.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제가 누군가를 평가하는 입장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냥 칭찬할 수밖에 없어요, 릴파는.(웃음)

인혜 씨가 릴파 씨의 오랜 팬이라서 그런 거 아니고요? 듣기로는 릴파 씨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부터 팬이셨다고.

 진수빈(감독): 리딩 처음 하던 날 생각나네요. 인혜 언니의 그 숨기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오타쿠력이….(웃음)
 안인혜(김선하 役): (머리를 짚으며) 아 정말.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그동안 잘 숨겨왔는데.
 릴파(김일하 役): 미리 알았으면 콘서트 티켓도 주고 앨범도 나올 때마다 챙겨주고 그랬을 텐데… 저 인혜 언니 작품 진짜 좋아하거든요. 다 챙겨보지는 못했지만….
 안인혜(김선하 役): 릴파는 바쁘니까 어쩔 수 없죠.
 릴파(김일하 役): 이것 보세요. 언니가 저를 정말 잘 챙겨줘요.

두 번째 장면은 어떠셨나요?

 안인혜(김선하 役): 진지한 얘기는 아닌데…… 제가 세게 밀치라고는 했지만, 어우. 아팠어요.(웃음)
 릴파(김일하 役): 같이 대본 리딩하는데 언니가 말해주더라고요. 여기선 좀 더 화내는 게 좋다고. 감정이 터져 나와야 하니 자제할 필요 없다고. 자길 발로 차달라고! 침대 아래로 떨어질 정도로!!
 안인혜(김선하 役):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다고? 한 번에 끝내자고 했었던 건 기억나는데 결국 NG가 나왔죠.
 릴파(김일하 役): 저는 연기가 처음이잖아요. 사실 엄청 걱정이 많거든요. 처음엔 NG 내는 게 너무 무서웠는데 스태프분들, 작가님, 감독님… 다 저를 칭찬감옥에 가둬주시니까.(웃음) 이젠 부담이 덜해요. 저 나름대로도 욕심이 나서 리테이크 하자고 하기도 하고요. 특히 인혜 언니가 저를 정말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연기 조언도 많이 해주고 사적으로도 만나서 연습을 도와주기도 하고. 언니도 바쁠 텐데 정말 고맙죠. 덕분에 쑥쑥 늘고 있답니다.
 진수빈(감독): 우리끼리는 훈훈한데 영화에선 너무 슬픈 장면이지 않나요. 꿈과 대비되는 현실이 너무 잔혹하잖아요. 그리고 일하의 꿈으로 나오는 장면이 마지막 촬영이었죠?
 안인혜(김선하 役): 맞아요. 마지막 촬영이 그런 장면이라 뭔가 좋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딱히 대사가 나와 있던 게 아니라서 그냥 선하랑 일하가 평범한 세상에서 어땠을 지 생각하며 반쯤 놀면서 하고 있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더라고요!
 릴파(김일하 役): 하다 보니 일하와 선하가 아니라 릴파와 인혜가 된 것 같지만요.(웃음) 그리고… 우는 장면. 일하의 정신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는 게 보이죠. 그리고 선하가 정말 여타 좀비들과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들어요.
 안인혜(김선하 役): 참 모호하죠. ‘산 자’와 ‘죽은 자’의 중간을 줄다리기하듯 연기해야 하는데 일하의 상황이 짠해서 자꾸 기울어버려요. 그게 일하의 착각이 되는 거겠죠. 어쩌면 언니가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멀쩡한 선하의 모습은 꿈에서만 나오잖아요. 영화 시작부터 좀비인 상태니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고요. 관객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일하는 혼자서, 영화 끝까지 가져가니 그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래서 더 짠해요.

마지막 장면에 대한 얘기도 듣고 싶은데요. 선하는 정말 살아있는 거였는지도요.

 안인혜(김선하 役): 어우. NG 엄청 많이 났었죠. 일하가 울면 안 되는데 자꾸 울어서. 릴파 위에 가만히 엎드려있어야 하는데 애가 우니까 화면이 자꾸 들썩이는거야.(웃음) 그리고 선하가 살아있는 거냐… 이 장면에 대한 건 노코멘트 할게요. 직접 본 관객분들의 여러 해석을 듣고 싶어요.
 릴파(김일하 役): 아 진짜… 정말 힘들었어요. 선하도 불쌍하고, 일하도 불쌍하고.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일하를 좋게 보지 못하는 분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저만큼은 끝까지 일하 편 하렵니다.
 안인혜(김선하 役): 그럼 저도요. 우린 가족이니까.(웃음)
 릴파(김일하 役): 아 진짜! 나 또 눈물 나올라 그래.

이렇게 영화 장면을 감독님 그리고 주연 배우 두 분과 함께 보고 이야기도 나눠봤는데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나요?

 진수빈(감독): 영화 홍보 멘트는 우리 주인공들에게 양보하도록 할게요. 머지않아 유튜브에 공개될 메이킹 영상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안인혜(김선하 役): 저희 영화 《동행의 대가》는 단순한 좀비 영화 이상이라고 생각해요. 자매 간의 복잡한 감정과 사랑,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장면들까지… 정말 빼놓을 부분이 없으니까요.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 번 봐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저는. 한 번은 혼자, 한 번은 친구, 한 번은 가족이랑. 특히 자매들에게 추천합니다.(웃음)
 릴파(김일하 役): 《동행의 대가》! 인혜 언니에게 있어서도, 저에게 있어서도 새로운 도전인 영화입니다. 그만큼 치열하게 촬영했고, 또 정말 재밌으니까요. 꼭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동행의 대가] 아잉네는 릴파파의 아기 새가 돼 | 메이킹 영상
#1 아기 새가, 되

“언니야. 손목 괜찮아? 좀 풀고 있을래?”

 소파에 멀거니 앉아있는 인혜에게 릴파가 쪼르르 다가갔다. 약간 피곤해 보였던 안색이 릴파가 다가오자 화사하게 펴졌다. 릴파는 인혜 옆에 앉아 앞으로 묶여있는 인혜의 손목을 토닥였다. 추운 날에 하는 촬영인데다 소품이라고는 해도 손목을 묶어놓고 있으니 살이 까질까 걱정됐다.

“좀 느슨하게 해주셔서 괜찮아. 괜히 풀었다가 다시 하는 게 더 귀찮지 뭐.”
“배고프지. 이거 먹을래?”

릴파는 롱패딩 주머니에서 비스킷을 꺼내 포장을 뜯었다. 초콜릿과 설탕이 발린 비스킷을 반으로 쪼개 입에 가져다주니 인혜는 곧잘 받아먹었다. 오랜 촬영에 지칠 대로 지친 인혜에겐 소중한 간식이었다. 오물오물 비스킷을 씹어먹고 있는 인혜의 코끝이 빨간 것을 보고 릴파는 따로 챙겨온 텀블러를 열어 캐모마일 차를 따랐다.

“이거 언니야가 자주 마시는 거. 손에 들려줄게.”
“고마워 릴파아….”

 손 사이에 잔을 끼워주자 인혜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호호 불어 마셨다. 얼어있던 몸에 따스한 온기가 돌자 경직되어 있던 근육이 풀렸다. 하아. 인혜가 나른한 숨을 내쉬자 릴파가 둘려 있던 패딩을 단단히 동여매 줬다. 머지않아 릴파는 감독의 부름에 달려갔다. 둘의 모습을 조용히 카메라에 담고 있던 스태프가 혼자 남은 인혜에게 다가와 물었다.

“두 분 모습이 꼭 일하와 선하 같네요.”
“그래요? 음… 이런 세상이 아니었다면 일선 자매도 이러지 않았을까 싶긴 해요. 선하가 일하를 더 챙겨줬을 것 같구. 물론 지금도 사이가 좋긴… 좋나? 선하 상태를 보면 이걸 좋다고 할 수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다 웃은 인혜가 멀리서 감독의 지시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릴파를 바라보았다. 카메라도 그쪽을 비춘다.

“자매 역할이라 그런지 촬영할 때마다 부쩍 친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촬영 시작하기 전에 제가 좀 낯가렸거든요. 최애가 눈앞에 있으니까 너무 긴장이 돼서.”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며 입을 가리고 웃은 인혜가 말을 이었다.

“근데 릴파가 우리는 자매 역할이니까 미리 친해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먼저 제안을 해줘서, 따로 데이트도 하고 그랬죠. 그렇다 보니까 촬영할 때도 좀 더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드릴 수 있는 것 같아요. 합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2 오래 기다리진 않아 설렘은 잠깐이니까

 인혜는 한사코 거절하려 했으나 릴파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언젠가의 만남에서 해주겠다는 다소 반강제의 약속을 해버렸기에 촬영장에서 시간이 남은 김에 릴파의 이번 활동 곡인 ‘Kidding’ 릴스를 찍기로 했다. 춤은 별로 자신이 없었지만 이왕 하게 됐으니 열심히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다. 릴파도 그런 인혜를 이해하는지 차근차근 세세하게 설명해줬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도 무한한 칭찬을 퍼부으면서.“

 이쪽으로 펼쳐주고. 허리, 춤, 가슴, 우-. 바로 돌아서? 잠깐이니까. kidding kidding Yes ah yeah ah yeah.“릴파의 시범을 떠올리며 차근차근 움직이던 인혜는 스스로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아이돌 춤이랑은 영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는데.

“우와. 내가 팔이랑 다리를 동시에 움직이고 있어!”
“아하하! 무슨 소리야.”
“안무 영상만 봤을 땐 하나도 모르겠던데. 너무너무 잘 가르쳐주시네요. 릴 선생니임-”

 노래에 맞춰 움직여보니 처음 몇 번은 버벅댔지만 결국 해내는 인혜였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앞으로 릴파의 신곡이 나올 때마다 같이 챌린지를 찍게 될 것이라고는. 그리고 그것이 릴파의 컴백 때마다 팬들이 내심 기대하는 무언가가 되리라고는.


#3 선하가 되는 과정

 촬영하는 또 어느 날, 인혜는 다소 지루해 보인다. 분장 시간이 꽤 길었기 때문이다. SNS를 확인하고 팬들에게 버블을 보낼 때는 느긋하게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말장난을 쳤지만 오늘 촬영할 부분의 대본을 읽을 때는 한마디도 없이 진지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담고 있던 카메라가 대본을 덮은 인혜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팬들은 인혜 씨가 좀비 역할로 출연하는 것에 반응이 어땠나요?”
“어우. 난리 났었죠. 좀비라니. 심지어 대사도 없고 보이는 건 눈밖에 없고…. 죄송하고 감사하죠. 전 제가 동하는 작품만 찍는데 둘기들은 항상 그런 제 편에 계셔주거든요. 많이 응원해주시니까 이렇게 무사히, 그것도 제 최애랑. 하하. 촬영하게 되었죠!!”
“인혜. 눈 가만히.”
“네엥.”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말에 바로 얌전해진 인혜를 두고 카메라가 점점 멀어졌다.


#4 마지막 날

 《동행의 대가》 촬영 마지막 날. 촬영장은 분주하면서도 마지막 촬영이라 그런지 조금 차분한 분위기였다. 스태프로부터 비하인드 촬영용 카메라를 빼앗아 온 릴파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마침 좋은 촬영 대상이 보여 숨죽여 다가갔다. 카메라엔 인혜가 진 감독 옆에서 화면을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 담기고 있다. 확인을 끝내고 손에 쥐고 있던 텀블러를 홀짝이는 인혜에게 릴파가 와락 달려들었다.

“꺄악! 아잉네 팬이에요!!”
“아. 깜짝아! 뭐야.”
“이거 비하인드 카메라. 지금 뭐 하고 계셨나요?”

 릴파가 카메라를 돌려 제 얼굴과 인혜의 모습을 같이 담았다. 릴파가 인혜의 뒤에서 그를 장난스레 안았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오늘 담길 화면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라면서요. 히잉.”

 울상을 짓고 있는 릴파의 머리를 인혜가 살포시 쓰다듬었다.

“왜 슬퍼해요.”
“뭔가 쓸쓸해요.”
“오늘 찍을 장면 뭔지 알고 있죠?”
“좀비 사태가 터지기 전의 일하와 선하 모습입니다.”
“영화 중에서 가장 행복해야 하는 장면이라고요. 그렇죠?”

 인혜의 말에 릴파가 울상 짓는 것을 그만두고 빙긋 웃었다.

“네…. 인혜 씨는 영화 마지막 촬영일에 어떤 생각이 드나요?”

 인혜에게 잔뜩 쓰다듬 받은 릴파가 인혜의 옆에 앉고는 갑자기 기자처럼 물었다.

“음. 완성작은 어떻게 나올까 궁금하기도 하고, 다음엔 어떤 걸 찍게 될까 기대되기도 하고, 릴파가 말했던 것처럼 쓸쓸하기도 하고. 특히 이번엔 더 그러네요. 너무 정들었나 봐요.”

 이번엔 인혜가 릴파를 꼬옥 끌어안았다. 추운 촬영장 히터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지만 역시 몸을 녹이는 데엔 사람 온기만 한 게 없었다. 아구구, 고생했어.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자. 응. 언니도 고생했다. 서로 등을 토닥이며 격려하다 그들을 부르는 스태프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마지막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으로 향했다.

 화면은 암전되었다 출연진들과 스태프를 모두 담은 풀 샷으로 켜진다. 박수 소리와 함께 촬영장을 가득 채우는 소리는 후련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든 풍경과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서서히 페이드 아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