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번호 666.”
극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경매장의 분위기는 경매사의 엄숙한 목소리에 가라앉았다.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뜸을 들이는 경매사의 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는 때였다. 찬 바람을 끊임없이 뽑아내는 에어컨 때문인지, 가라앉은 분위기 탓인지, 살며시 소름 끼치는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조각난 샹들리에입니다. 여러분들 중엔 아직도 이 극장에 얽힌 기괴한 사건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 사건, 오페라의 유령! 아직도 그 수수께끼는 모두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다 아는 이름이 경매사의 입에 오르고, 미래를 예견한 이들은 자연스레 천으로 가려져있는 샹들리에로 고개를 올렸다. 다들 이 순간을 기다려왔었기에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샹들리에는 어엿한 주인공 중 하나였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재앙의 샹들리에입니다. 우리 경매소에서는 이 샹들리에가 다시 작동할 수 있도록 전기장치를 복원하였습니다. 당시 이 물건이 얼마나 화려한 장관을 연출했는지 다시 한번 보기 위해서죠. 혹시 이 화려한 전기 조명에 그 시절의 유령도 깜짝 놀라 도망가지는 않을까요. 여러분!”
우레와 같은 외침이 끝나자마자 오르간 소리가 무대를 잡아먹을 듯 울려 퍼지고, 큼지막한 샹들리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금방이라도 관객들을 덮칠 것만 같이 보이는 샹들리에의 모습에 지레 겁을 먹었다. 습관이 된 망상을 얼른 집어넣고 시선을 내려 무대 위에 등장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듯 등장하는 수많은 배우 사이로 오래도록 응원한 사람이 보였다. 내가 이곳에 앉아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초라하게 등장하여도 명실상부 이 무대의 주인공인 그녀를 나는 한시라도 놓칠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온 이곳은, 그 고생이 보람 있게도 뜨거운 열기가 피부로 전해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많이 고생해 온 사람이니까, 그녀가 빛나기 시작한 것에 뭐라도 보태준 것처럼 자랑스러웠다. 처음 서 보는 큰 무대에 긴장했던 그녀도 점차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평소와 같은 생생한 모습이 되었다. 어느새 극이 끝나고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나는 그녀를 보며 작은 소망을 품었다. 언젠가 나도 저 무대 위에 설 수 있을까? 언젠가, 나도 저 사람 옆에 설 수 있을까.
아이네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사랑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 만큼 그녀가 스쳐 지나간 시간 속에서 노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좋아하는 만큼 가까이 있고 싶었던 노래를 위해 대학 진학을 성악과로 정한 것은 아이네의 인생에서 꽤 큰 도전이었다. 넘치는 열정 덕분에 어찌저찌 대학에는 들어갔으나, 자신보다 넘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꿈을 뭉개려 비소를 날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건 가끔 마음이 흠뻑 젖어버릴 정도로 혹독했다. 아이네에게 노래의 소질이 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더 빛나는 이가 있다는 것이 늘상 문제였다. 아이네는 순수한 사랑이 현실에 녹아들지 않게 버둥거렸다. 아이네는, 그저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그뿐이었다.
시작은 가벼운 진심이었으며 그 동기는 사소한 칭찬이었다.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가볍게 던져진 ‘너는 연기를 진짜 잘하는 거 같아. 무슨 캐릭터 하나 얘기할 때도 네가 말하면 빠져들더라.’라는 말은 환한 등대가 되어 새로운 길을 빛내었다. 굳이 성악이 아니어도 좋았다. 노래만 부를 수 있다면. 그렇게 발을 들이게 된 것이 뮤지컬이었다. 아이네는 줄곧 걸어오던 길에서 샛길로 빠지는 건 두려웠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선택으로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미약한 기대감마저 있었다.
물론 뮤지컬 판에 들어가 단번에 성공하였다는 드라마틱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름 없는 단역 하나조차 붙잡기 힘들었다. 재능 때문에? 연습 부족으로? 이유를 하나하나 세어볼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아이네는 깊이 생각하기도 싫어 연습만을 반복하고 오디션을 닥치는 대로 보았다. 불합격 메시지로 늘어난 한숨이 오디션 지문보다 길어질 때, 처음으로 배역을 하나 따낼 수 있었다. 마치 학예회의 배경과도 다름없는, 누군가에게 떠들썩하게 자랑하기도 민망한 소박한 조연이었다. 그 작은 역에도 어찌나 하늘을 날아오를 것만 같던지. 합격 소식을 들었던 날은 소소한 자축을 위해 평소보다 조금 더 비싼 값을 주고 밥을 먹었다.
이젠 꽤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아직도 첫 공연을 기억한다. 무대에서 가장 빛나는 주연보다 심장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이 두근거렸다. 모든 힘을 쏟아내어 극을 마쳤을 때는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날부터였다. 처음으로 아이네의 팬이 생겼다. 딱 한 명. 익명으로 전해진 편지는 행여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을까 무서웠지만 호평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어쩌다 자신을 눈여겨보았는지는 몰라도 편지와 꽃다발은 다른 극을 맡아도 이어졌다. 아이네는 불합격 통지들에 조금씩 깎여나가 자신의 길이 아닌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편지를 확인했다. 누군가 자신을 응원하고 있었고 보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처음 받았던 편지는 깔끔하게 코팅되어 거실 한가운데 액자로 정성스레 장식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이 열렸다. 뮤지컬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져 내렸다. 배우의 이름이 아닌 실력만으로 평가하는 공정한 심사로 엄격하게 진행될 거란 얘기에 아이네는 떨어지면 어떡하지란 고민조차 없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지금껏 쌓아온 불합격에 하나쯤 더해져도 그다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오디션을 위한 연습은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지만, 그만큼의 결실을 맺었다. 처음으로 맡게 된 주연. 아이네는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어 합격 메시지를 수차례 확인해야만 했다. 인기 배우와 나란히 맡게 된 역은 너무나도 커다랗게 느껴졌고 아이네를 공격하는 이도 적지만은 않았다. 다행히 아이네는 그런 고초에 집중할 새도 없이 준비 기간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긴장으로 사색이 되어 시작한 극은 대황리에 끝났고 아이네는 그것으로 겨우 인정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껏 여러 배역들을 맡게 되었고 오페라의 유령 재연과 삼연에도 불릴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삼연의 캐스팅 발표를 마친 뒤풀이였다.
주연 배우들이 꽤 많이 불참한 뒤풀이였던지라 술자리를 기피하는 아이네 또한 슬쩍 발을 빼고 싶었지만, 주인공이 여기서 더 빠져서야 되겠냐는 협박 아닌 협박으로 발이 묶여버렸다.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물만을 들이켜고 있을 때, 술이 몇 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얼굴이 벌겋게 변한 연출 감독이 아이네를 붙잡고 노래를 불러달라고 성화였다.
“아이네 씨! 좋은 날인데 분위기도 띄울 겸 따악 한 곡만 해주면 어때!”
“아... 여기서는 힘들지 않을까요?”
“여기가 뭐 어때서! 내가 원래 이런 거 부탁하는 사람 아닌 거 알잖아. 한 번만 불러주라.”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면 끝까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속마음을 아이네는 꾹 눌렀다. 주변을 둘러보자 고기 굽기에 바쁘던 주변 사람들조차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빠르게 노래를 부르고 상황을 무마시키자는 판단이 선 아이네는 감독에게 물었다.
“그럼 어떤 곡이 좋으세요?”
“어, 음, 아! 아이네 씨, 날도 날이니까 는 어때? 노래 좋잖아.”
좋은 노래라는 점에는 동의했으나 상대역이 필요한 듀엣곡이었다. 감독은 그 역을 맡은 배우들이 전원 불참했다는 걸 술과 함께 마셔버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제안에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을 아이네가 고민하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제가 같이 부를게요!”
갑작스런 난입에 모두가 놀라 바라본 곳에는 릴파가 있었다. 인기 아이돌 릴파. 아이돌이 캐스팅되었다는 것도, 그 배역이 주연이 아닌 주인공의 친구 역이었다는 점도 파격적인 이야깃거리였다. 릴파는 아이네에게 “괜찮죠?”라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이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으나 릴파가 가사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걱정은 마이크 대신 숟가락을 잡고 목을 다듬은 릴파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녹아들었다.
어둠 얘긴 그만, 두려움도 그만.
내가 언제나 함께 그대 지켜요. 항상.
그 어떤 시련도, 눈물도, 슬픔도.
내가 그대 곁에서 늘 보호해줄게요.
마치 준비라도 한 것만 같은 릴파의 완벽한 시작에 아이네는 마치 이곳이 무대인 것처럼 빠져들었다. 반주조차 없는데도 목에서 자연스레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랑한다 내게 말해줘요.
변치 않는 여름날처럼 원한다고 내게 말해줘요.
진실만 약속해주세요. 바람은 그것뿐.
1절부터 시작된 노래는 생각보다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곡이 끝나갈 무렵에는 멀었던 둘 사이의 거리가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가까울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소리가 없어지고 둘의 시선이 교차될 무렵, 주변 모두가 박수쳤다. 특히 노래를 요청한 감독 마음에 쏙 든 모양인지 가장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야~ 릴파 씨는 가사를 언제 외웠대? 본인 역도 아닌데 이렇게 잘해도 돼?”
“오페라의 유령을 자주 봤거든요. 좋아해요.”
말쑥하게 웃어 보인 릴파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다른 이야기로 빠르게 불타올라 본인 자리에 돌아가기도 머쓱해진 아이네는 엉성하게 릴파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릴파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이랑 같이 노래하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제가 더 영광이죠. 어, 그런데 저보다 릴파 씨가 데뷔가 빠르지 않나요?”
“이 판에선 제가 신입이죠~”
너스레를 떨던 릴파가 아이네의 옆에서 쉴 틈 없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이 고기가 너무 맛있다거나 연습이 너무 고달프지 않냐와 같은 쓰잘데기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곧잘 낯을 가리던 아이네는 그 얘기를 들으며 배를 붙잡고 웃어대었다. 쉴 틈 없이 입꼬리에 호선을 그렸더니 볼이 팽팽하게 아플 정도였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웠는지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데 그냥 웃음이 나왔다. 아이네는 집에 돌아가면서도 그 이야기를 곱씹었다.
어느새 준비 기간은 끝나가고 첫 공연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동안 릴파는 마치 거절당하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이네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네는 말하지 않아도 큼지막하게 느껴지는 호의에 거리를 두지 않고 발을 맞추듯 사이를 좁혀나갔다. 릴파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냥 그러고 싶었다. 쉬는 시간엔 마주 앉아 요새 유행하는 디저트 얘기를 하고, 메신저로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둘은 언니와 동생이 되었다.
‘릴파 콘서트 때 커피차 보내길 잘한 거 같아.’
아이네는 반려견 뭉뭉이와 함께 산책하다 문득 생각했다. 언제나 살갑게 굴어주는 동생이 고마워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아이네는 고르고 고르다 콘서트 때문에 고생하는 릴파를 위해 커피차를 보냈다. ‘좋아할까? 그랬으면 좋겠다.’라며 내심 바랐던 선물은 당연하게도 기쁨에 퐁당 빠진 릴파의 무수한 인증샷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행복해하던지 아이네는 마치 자신이 선물을 받은 것처럼 흐뭇해졌다. 과거 생각으로 뭉뭉이보다 발걸음이 조금 빨라지던 아이네의 핸드폰이 느닷없이 전화라도 온 마냥 울리기 시작했다.
『언니야』
『ㅇ니야』
『언니』
『언니는 이번 뮤지컬에서 어떤 넘버가 좋아?』
『갑자기? ㅋㅋㅋㅋ』
『릴파는 뭐가 좋은데?』
릴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자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뜬금없는 연락을 해왔다. 자리에서 우뚝 멈춰 손가락을 튕기고 있자, 뭉뭉이가 왜 가만히 있냐며 낑낑거리며 아이네의 다리에 얼굴을 부볐다.
“뭉뭉아, 잠깐만~ 언니 답장 좀만 할게~”
얼른 앞으로 가자고 성화인 뭉뭉이를 쓰다듬으며 달래고 있다 보니 릴파에게 빠른 답장이 돌아왔다.
『나? 음...』
『원래 좋아하던 넘버가 있었는데 최근엔 다른 게 좋아』
『언니랑 둘이서 부르는 넘버가 좋아!』
『징짜? 감동이야ㅠㅠ』
『그래서 언니야는 뭐가 좋은데?』
『비밀ㅎㅎ』
『아잉네 미워ㅠㅠㅠ』
한참을 제자리에서 핸드폰만 바라보니 참다못한 뭉뭉이가 큰소리를 내며 관심을 끌었다. 주변에 관심을 원하는 강아지가 두 마리나 되어 아이네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른 기분이었다. 아이네는 뭉뭉이의 사진을 찍어 ‘릴파 친구다.’라는 말과 함께 릴파에게 보냈다.
『헉!! 넘 귀여웡』
『나도 사진 보낼래!』
키우는 고양이 사진이라도 주는 걸까. 전에 보았던 귀여운 검정 고양이가 화면을 가득 채우길 기대하며 기다리자, 연습실에서 환한 미소를 머금은 릴파의 사진이 우수수 떠올랐다. 허를 찔린 기분에 아이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큰소리를 내다 혹시 주변이 쳐다보진 않을까 주위를 살펴야만 했다.
『아니ㅋㅋㅋㅋ 고양이 사진을 올려야지!!』
『이잉 릴파도 이뻐해조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산책길을 걸으며 몇 번의 투닥거림이 오갔다. 연락이 끊기지 않은 탓에 아이네는 평소보다 더 길게 산책 코스를 돌게 되었다. 기진맥진한 채로 집에 돌아와 침대로 뛰어들었을 때는 답장을 주고받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이제 곧 공연이라 나 너무 떨려』
『언니야는 자주 해봤으니까 안 떨리겠다』
아이네는 감겨오는 눈을 꿈뻑거리며 릴파가 보낸 문장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릴파도 새로운 무대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네 또한 단 한 번도 무대 앞에서 덤덤하게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귓가에 심장이 달려있는 기분을 늘상 느끼며 버팀목이 되어준 말을 되새겼다. 아이네는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켜 한켠에 소중하게 보관된 종이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익명의 팬에게 받은 편지 몇 장과 정성스레 말린 꽃다발이 있었다. 버석거리는 꽃이 부서지지 않게 조심히 편지 하나를 꺼내들어 계속 눈에 담았던 문장을 다시 읽어내렸다.
‘비록 산 정상까지 도달하지 못했어도 그때 먹었던 김밥이 참 맛있었지란 생각을 한다면, 그런 추억 하나라도 남길 수 있다면, 과거가 슬프게만 다가오진 않을 거예요. 어쩌면 불안한 미래조차 산뜻하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직 초보였던 시절, 대사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자신을 질책하며 슬퍼하고 있을 때 팬에게 받은 편지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은 편지여도, 아이네에게는 큰 위로가 되어준 문장이었다. 한 번도 팬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만약 만난다면 지금까지 응원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릴파도 이걸 들으면 힘을 낼 수 있을까?’
아이네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타자를 꾹꾹 누르고 있을 때, 다시 릴파에게 연락이 왔다.
『나 다시 연습하러 가봐야겠다! 나중에 봐용!』
남겨둔다면 분명 릴파가 볼 게 분명했지만 아이네는 그러지 않았다. 기왕이면 만나서 해주고픈 이야기였다. 그래, 다음에 꼭 얘기하자. 아이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 탓에 아이네의 뇌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공연 시작 전 백스테이지는 혼잡함으로 가득했다. 스태프들은 무대 세팅과 조명, 음향 등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며 배우들은 의상과 메이크업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준비를 다 마친 아이네의 눈에 평소보다 어두워진 릴파가 보였다. 구석에 주저앉아있는 모습으로 보아 제아무리 밝은 릴파라도 처음의 긴장감 앞에선 제법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아, 언니야 왔어?”
아이네는 불현듯 이 순간이 가장 릴파에게 말하기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릴파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마음속으로 정리해놓은 말들을 읊으려 할 때, 릴파가 힘차게 일어서며 외쳤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맑은 표정이었다.
“괜찮아! 정상에 못 올라가도 좋은 추억 하나 남길 수 있으면 되잖아!”
릴파가 눈을 맞추곤 “그렇지?”라며 아이네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이네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는 릴파가 놀라웠다. 이걸 어떻게 알았지? 흔한 말이긴 하지. 하지만. 수긍과 반박이 겹겹이 쌓여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궁금증을 도무지 참지 못하고 내뱉으려 한 질문은 또다시 스태프의 공지에 가로막혔다.
“릴一”
“배우분들은 자리에서 스탠바이해주세요! 곧 시작합니다!”
릴파의 이따 얘기하자는 눈짓으로 무마된 대화를 끝으로 둘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도 아이네는 혼란에 허우적거렸다. 본래라면 한참 전에 주인공 ‘크리스틴’이 되었을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여전히 ‘아이네’였다. 릴파 쪽으로 향하는 고개를 힘을 주어 멈춰 세웠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아이네는 눈을 감고 숨을 한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크리스틴’이었다.
“브라보!”
초반에 있는 아이네 단독 넘버가 끝난 뒤, 관객과 배우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가장 어려운 넘버는 아니었지만 고비 하나를 넘겼다는 생각에 아이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은 릴파와 함께하는 곡이었다. 그녀의 절친이 된 릴파는 총총 걸어와 아이네의 두 손을 맞잡았다. 릴파에게서 지금껏 수없이 연습한 노래가 향기롭게 흘러나왔다.
크리스틴, 도대체 어딜 그리 꼭꼭 숨어있었니?
어쩜 넌 그리도 노랠 잘 하니?
그 비결 내게도 좀 가르쳐주지.
너의 훌륭한 선생님이 누구길래?
정해진 수순처럼 아이네는 답했다.
아버지는 천사에 대해 말씀하셨지.
난 항상 꿈꿨지 그 천사 나타나길.
릴파와 눈이 마주치자 갑작스럽게 잠재웠던 혼란이 다시 일어나 아이네를 깨웠다.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도 아니고, 그다지 흔한 말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릴파가 여태껏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이지 않을까. 뇌리를 스친 생각은 확증도 없이 확신이 되었다.
이제 그 존재 느끼네.
이곳에 와 있단 걸 알아요.
아이네는 시선을 관객으로 돌려야 했으나 릴파에게 고정한 채로 다음 가사를 이어나갔다. 찰나였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는 무대 위에서 ‘아이네’를 내보였다. 릴파는 디테일에 고집하는 아이네가 다르게 행동해도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따스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번엔 정말 아이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두 사람은 백스테이지에 돌아가서도, 인터미션 시간에도 전하고 싶은 마음을 건네지 않았다. 커튼콜은 무릇 가장 마지막이어야만 했다.
무대는 성공리에 끝이 났다. 아이네는 평소와 같은 크리스틴을 연기했으며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던 릴파 또한 실수 한번 없이 완벽하게 마칠 수 있었다. 무사히 첫 공연을 끝내고, 관계자들이 자축하는 동안 아이네는 릴파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릴파의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 환영처럼 사라진 릴파를 쫓다 지친 아이네는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로 대기실로 돌아왔고, 무심결에 택한 마지막 장소, 그곳에 릴파가 있었다. 릴파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방금 딴 것처럼 싱싱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언제나 이걸 직접 주고 싶었는데.”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네는 꽃다발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지금까지 받아본 꽃 중 가장 화려한 꽃이었다. 바스락거리는 꽃다발을 끌어안으며 아이네는 “난 줄곧 고맙다고 전하고 싶었는데. 정말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지 않았어?”
“음~ 그럼 언니랑 가장 먼 곳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
조그맣게 “난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이라고 속삭이던 릴파는 가장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비록 여태껏 지켜온 팬심을 밝혔지만 끝까지 릴파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꾼 꿈들 속에 당신이 있었다고, 당신 옆에 서는 것이 오랜 자신의 꿈이었다고. 영원히 아이네는 그걸 알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