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f Y o u
                         


릴파는 절망적이었다. 두 손의 손가락들로도 모자랄 세월동안 가지고 있던 희망과, 그와 비슷한 기간동안 쏟아부은 노력 끝에 닿은 이상에 이제 남은 것은 화려한 꽃길을 걷는 일 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오직 이상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탓이었을까. 높은 산에 오르면 남은 일은 내려오는 것 뿐이라는 걸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올랐었던 데뷔 무대. 신인으로써 남들과 같은 관심을 받을 수 있을거라는 욕심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다음 무대와 그 다음 무대까지의 공백 기간이 몇 주에서 몇 개월이 넘어가고, 모르면 바보일 정도로 느껴지는 부족한 무대에 릴파는 뒤늦게 지금의 저의 모습이 진정 내가 원하던 모습이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거실과 방이 하나뿐인 원룸에서는 4명의 멤버들이 함께 살아가야했다. 소속사에서 주는 도움은 그것이 끝이었다. 숙소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이곳의 월세까지도 본인들이 감수해야하는 상황에서 그 외의 생활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찾아주는 이가 없으니 쓸모가 없는 이들은 점점 기억 속에서 잊혀져 회사에서도 눈길을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의 작은 희망을 놓지 않기위해 릴파와 멤버들은 알바라도 해가며 겉치레 뿐인 그룹을 유지해나갔다. 그들에게는 데뷔 무대에 올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었으니까. 수 년간의 연습생 생활을 해오면서 같은 처지에 있던 많은 이들이 절망을 맛보았던 것을 봐었다. 그러니 비굴해도 자신들의 처지가 나은 것이리라 합리화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6,300원 입니다-. 봉투 드릴까요?”
“그럼 이걸 그냥 손으로 들고 가?”

오늘도 릴파는 속으로 심한 말을 삼켰다. 몇 번을 보아도 이해하지 못할 유형의 사람들을 상대하고 몸과 마음을 소비하며 릴파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최저임금에 딱 맞춘 급여와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 몇 개였다. 당연하게도 편의점 점장님과 시도때도없이 오가는 손님들 중에 릴파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릴파는 자신이 아이돌이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길거리로 나섰다.
알바가 일찍 끝난 하루. 늦여름에 선선한 오후는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딱히 다른 일정이 없었던 릴파는 통기타를 들고 공원을 찾았다. 제법 익숙한 발걸음으로 사람들이 적당히 다니는 곳에 자리잡은 밴치에 앉고는 기타를 조율했다. 몇 번 줄을 췽기니 지나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끌렸다. 조용히, 느리게 울려퍼지는 어쿠스틱 기타의 소리는 아직 연주가 아니더라도 관리가 잘 된 듯 감미로웠다. 조율이 끝난 기타는 곧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고, 그 위에 쌓이는 릴파의 음색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의 곡이 끝나자마자 다시 갈 길을 가버리곤 했다. 익숙했다. 바쁜 사람들의 앞길을 막으면서까지 노래를 부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보통 길어도 두 세곡을 부르고나면 처음에 끌었던 관심이 무색하게도 거의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네 번째 곡이 끝나고도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보이는 사람이 보였다.

“듣고 싶은 노래라도 있어요?”
“불러주실 수 있나요?”
“아는 노래라면요.”

릴파는 기꺼이 그 사람에게 관심을 내비쳤다.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걸까. 흰 머리카락을 가진 순수한 여성은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 했다. 음-. 길지않은 고민 끝에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 제목은 다행이도 릴파가 아주 잘 알고있는 노래였다. 긴 연습생 시절 때부터 질리도록 댄스곡을 듣다가도 시간이 남으면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던 노래. 잘 알기를 넘어 너무 좋아하던 노래였다. 노래 취향이 맞는걸까싶어 좋아하는 것도 잠시, 릴파는 얼른 머릿속에서 그 곡의 코드를 그렸다.
천천히 목을 가다듬고 다시 기타줄을 튕겼다. 원곡은 꽤 흥겨운 비트가 있는 노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연주가 가능한 악기는 어쿠스틱 기타와 릴파의 목소리 뿐이었기에 릴파는 자신의 방식으로 곡을 적당히 어레인지 했다. 원곡보다 느린 템포, 잔잔한 분위기와 부드러운 멜로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릴파의 보컬. 모든 것이 완벽한 선율이었다. 그렇게 굴곡 없이 이어지는 그것에 변주가 시작된 것은 첫번째 후렴이 시작된 직후였다.

“It’s raining man-”
“It’s raining man-”

릴파의 목소리에 겹쳐져오는 얇고 묵직한 음색. 그렇게 튀지도 않고, 가려지지도 않고 적절하게 받쳐지는 화음에 릴파는 하마터면 가사를 절어버릴 뻔 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다급하게 찾았다. 애초에 목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노래를 감상하던 사람들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바로 이 노래를 추천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릴파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는 그 사람의 눈동자가 너무 따뜻했다. 저것은 무언가를 향한 불타는 애정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비록 릴파를 향하고 있었지만 릴파는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란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옅게 깔린 미소 위에 보라색 눈동자, 그것도 눈이 마주치가 릴파는 잠시 넋을 놓아버렸다.

무슨 정신으로 노래를 다 부를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보니 자신도 모르게 기타의 연주까지도 끝나 있었고, 주변에는 처음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제가 눈치없이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좋아하는 노래라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잘 불르셔서 놀랐는걸요. 혹시 노래 부르는 일을 하시나요?”
“저 그게⋯, 근처 극장에서 뮤지컬을 좀 하고 있어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중간중간 파트가 비어있는 짧은 화음 뿐만으로도 노래의 주인인 릴파조차 정신이 팔려버릴 정도였으니 관중들을 집중시키는 재능이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것은 비단 실력 뿐만이 아니었다. 아까도 잠깐 마주쳤지만 다시 한 번 보니 굉장히 눈에 뛰는 미모였다.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얼굴 잘난 사람들을 질리도록 봐왔음에도 눈 앞에 여자는 그들의 얼굴을 잠깐 잊게 해줄 위화감까지 느껴질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본인의 외모는 모르는건지 눈이 마주친 상태로 넋을 놓고있는 릴파가 대답이 없으니 쑥쓰러운 눈치로 다시 눈을 마주쳐왔다. 릴파는 그게 무례라는 것을 눈치챘다. 미안해요. 딱히 따라오는 변명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도 게의치 않아 보였다.

“제 이름은 아이네라고 해요.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보러와주세요, 릴파 씨.”
“아이네⋯. 예쁜 이름이네요. 꼭 갈게요.”

호선으로 휘어지는 눈매가 보기 좋았다. 릴파도 아이네를 향해 같이 웃어준 뒤에 아이네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원래라면 릴파는 그 자리에서 몇 곡을 더 연주했겠지만 그날따라 노래를 더 부를 기분이 들지 않았다. 더 불러도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릴파는 기타를 다시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노래를 얼마 부르지 못했지만 돌아가는 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직까지도 아까 불렀던 노래가 속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그때의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썩 나쁘지 않은 감정이 오래가기를 바라며 릴파는 속으로 아까의 여자를 떠올렸다. 아이네라고 했었지. 그런데⋯ 내가 자기소개를 했었나?

늦은 저녁이 되어야 숙소에 다른 멤버들도 귀가를 했다. 오늘도 릴파에게는 쉽지 않은 하루였다. 다들 이 껍질 뿐인 그룹을 유지하느라 바쁜 탓에 함께 저녁을 먹지 않은지 오래였다. 처음엔 다들 지나가다 얼굴을 보며 실소를 뱉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 좁은 공간 안에서도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버텼다. 지금처럼이라도 버틴다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봐주지 않을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릴파는 언제나와 같이 데뷔 무대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날은 릴파에게 아무런 일정이 없는 날이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이렇게 가끔 찾아오는 여유가 너무 절실했다. 릴파는 느즈막하게 일어나서 간단하게 씼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제 무엇을 할까, 잠깐의 고민에 빠졌다가 전날의 버스킹이 떠올랐다. 뮤지컬을 한다던 아이네라는 사람. 검색하면 무언가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휴대 전화를 키고 검색 사이트에 ‘대학로 뮤지컬 아이네’를 검색했다. 다행히도 그녀에 대해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몇개월 전에 섰던 한 무대의 커튼콜의 영상이 운이 좋게도 알고리즘을 타 대학로 뮤지컬계에서는 꽤 얼굴이 알려져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영상 안에서 그녀는 그 무대에서 주역을 맡은 듯 했다. 홀로 무대를 가로질러 앞으로 나와 우아한 인사를 하는 아이네의 모습은 영상 뿐이라도 감탄스럽게 그지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서치는 이후로 1시간은 더 이어졌다. 그러다보니 인터넷을 통해 들어간 sns에서 다음주에 공연이 있을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릴파는 잠깐 저의 스케쥴을 읊었다. 목요일 오후 7시. 그 시간이라면 알바가 끝나고 가도 여유로울 듯 했다. 

일주일이 지나기까지 릴파는 세 번은 더 버스킹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엇갈리는건지, 연습하느라 시간이 없는건지 아이네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이해는 갔다. 원래도 버스킹 중에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고, 일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다보니 괜히 노래를 부르면서 그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생각은 뮤지컬 직전까지도 끊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자신의 무대를 준비하느라고, 그리고는 무대라는 것을 상상할 여유도 없었는데 간만에 무대를 보는 것도 그렇고, 남의 무대를 기다리게 되는게 너무 오랜만이라 의미도 없이 긴장되었다.

이번 뮤지컬에도 아이네는 주역이었다. 어느 한 시골 공녀가 어려운 집안 사정을 이겨내고 데뷔탕트를 무사히 치루는 이야기. 그 시골 공녀를 연기하는 아이네의 모습은 정말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같았다. 거기에 더불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또 색다로웠다. 저번에는 정말 살살 불렀던거구나. 작은 소극장이었지만 마이크 하나 없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목소리가 온몸을 흔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커튼콜. 공연 전에 보았던 영상이 함께 떠올랐다.

“아, 릴파 씨! 오셨구나. 고마워요.”
“너무 잘 봤어요. 저 사실 뮤지컬 처음 본거거든요.”

뮤지컬 특유의 진한 화장을 지운 아이네는 공연장 밖에서 나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던 중 릴파와 마주쳤다. 사실 공연 중에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이네는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인사해주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먼저 알아봐주고 인사해주는 아이네의 표정은 매우 기쁜 듯 웃고 있었다.

“저번에 같이 노래 부를 때부터 느꼈는데 노래를 엄청 좋아하시나봐요. 아까 표정 보니까 행복해보이시더라고요.”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사실이기도 하고요.”

환한 미소가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은은하게 변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감정. 뮤지컬 배우라서인가, 표정에서 보이는 감정이 확실해보였다. 릴파는 그것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있지만 각자 다른 의미가 다른 눈빛임을 아이네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서로 궁금했다. 노래라는 것에 대해 반응이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먼저 빠르게 입을 연 것은 아이네였다. 이후에 시간이 되느냐고. 릴파도 물어보고는 싶었지만 다른 배우들과 뒤풀이가 남아있을까싶어 물어보지 못했던 것인데 먼저 물어봐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두 사람이 따로 만난 곳은 대학로와는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근처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를 찾기 힘들기도 했고, 좀 조용한 곳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걷는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나란히 걸으면 누군가 걸음이 뒤쳐지면 그 속도를 맞춰주기도 했고, 누군가 빨라지면 그것을 쫓아가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입은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불편해보이지는 않았다. 둘 다 당연하다는 듯했다. 그리고 좀처럼 열리지 않던 입이 열린 것은 한 골목에 있던 작은 카페를 발견한 후였다.

“아이네 씨, 저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릴파는 며칠전부터 한가지 고민에 빠졌다. 아이네를 향한 무언가에 대한 의문. 그것을 물어볼지 말지 꽤 긴시간 고민해왔다. 그런데 때마침 자리가 만들어졌다. 아이네는 괜찮다는 듯이 눈을 마주쳐왔고 릴파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저 아세요?”

반쯤은 예상했고, 반쯤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도 질문을 들은 아이네의 반응을 보고 확신으로 자올랐다. 언젠간 이런 질문을 받을 줄 알았던 모양인지 아이네는 양손으로 잡고 있던 따뜻한 찻잔을 잠시 꼼지락거리며 만지더니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정도 예상한 답변이었기 때문에 릴파도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을 뿐.

아이네는 릴파가 먼저 물어보지 않아도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공원에서 봤을 때부터, 어쩌면 그전에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정말 처음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단연 TV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때였다. 아이네는 원래 TV를 자주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친구의 자취방에 놀러간 날이었고, 그곳에 TV가 켜져 있었고, 때마침 릴파의 첫 데뷔무대가 있던 음악 프로그램이 하고 있었다. 그런 프로그램들을 챙겨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노래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들려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노래를 듣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또 때마침 친구들이 잠깐 조용해지던 타이밍에 릴파의 무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보니 아이네가 릴파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우연히 음악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고, 우연히 그날이 릴파의 데뷔였으며, 우연히 그 무대를 아이네가 보았던 것. 이 과정에서 운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이네의 기억력이 좋아서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던 릴파를 보고 그 TV화면 속의 릴파를 떠올렸던 것 뿐이었다.

솔직히 릴파는 바로 기쁘다는 등의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무대를 보고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웠지만 이젠 그 기억이 너무 희미해졌기 때문일까, 지금의 감정을 무어라 정의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고 가만히 있으니 아이네는 그런 릴파를 기다려주었다. 차를 두어모금 마시기도 하고, 릴파와 눈이 마주쳐 살짝 웃어주기도 했다.

“그럼⋯ 지금 제 상황도 잘 아시겠네요⋯.”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낮아진 자존감에 릴파는 겨우 끌어올리던 입꼬리도 이제는 어떤 모양인지 신경쓸 수 없었다.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하고 있는 걸 알아요. 응원할게요. 당신의 팬으로써.”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 그리고 손길. 테이블 위에서 잔도 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며 맞잡은 두 손 위에 아이네가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릴파는 이런 참견이 썩 나쁘지 않았다. 기분 나쁠 이유도 없었다. 저에게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다정한 손길과 말투는 마음이 편안해지게 만들어주었고, 팬이라는 말은 갑자기 심장이 뛰게 만들어주었다.

점점 릴파의 눈에 힘이 풀리는게 보이는지 아이네는 이번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억도 안나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부터 학생 때 한 번 꿈의 좌절을 겪었다는 이야기와 결국은 지금은 노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름 밝지만은 않은 이야기에 릴파는 귀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하는 아이네의 얼굴이 꽤 즐거워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저 지나간 추억이기 때문일까, 아직 릴파에게는 힘든 부분이었기에이런 이야기들을 은은한 미소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그걸 묻는다고 그것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날 이후로도 두 사람은 자주 함께했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연락도 주기적으로 했고, 릴파가 알바하는 곳에 가끔 아이네가 찾아가기도 했고, 아이네가 일하는 곳에 릴파가 찾아가기도 했으며, 이후로도 진행되는 아이네의 무대가 있다면 릴파는 일정을 바꿔서라도 찾아가곤 했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호칭이 아이네 씨, 릴파 씨에서 아이네 언니와 릴파로 바뀌기도 했고, 두 사람의 말도 짧아졌다. 릴파는 더이상 처음에 느꼈던 위화감을 아이네에게서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바보같이 착한 탓에 놀리기까지 했다.

“언니, 요즘에는 연습 안가는거 같더라?”
“아, 한동안은 좀 쉬려고. 요즘 너무 바빴잖아.”

사람이 많지 않은 카페였다. 게다가 대학로와도 먼 곳. 굳이 이런 곳을 찾아오는 이유는 의도치않게 무대가 많아진 아이네의 위상이 제법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눈에 뛰는 외모와 뛰어난 실력, 그리고 노래를 부를 때 보이는 진심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몇 없는 기사들 중에서는 꽤 큰 제작사에서도 아이네의 캐스팅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정작 본인은 그런 기사들을 모르는 듯 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아이네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아이네는 차를 마시고 있었고, 릴파는 제 몫의 커피를 테이블에 둔 채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평소에 잘 들어가지 않았던 sns가 그날따라 눈에 들어와 릴파는 별 생각 없이 클릭했다. 하지만 릴파는 그곳에 펼져진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예전에 보다 만 글만 보였었다. 그런데 그 글들의 알고리즘이 점점 아이네에 대한 이야기와 영상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무대가 시작하기 전 공연장 앞에서 아이네를 본 사람들의 영상이나 커튼콜의 영상, 공연이 끝나고 건물 밖에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손인사를 하는 영상 등 꽤 많은 편이었다. 릴파는 아무생각없이 그 영상들을 모두 보았다. 이어폰을 하고 있지 않은 탓에 새어나가는 소리에 무슨 영상을 보냐는 아이네의 물음에 언니 직캠 영상이 떠돈다는 식으로 놀리니 아이네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꼴을 볼 수 있었다. 릴파는 그 모습을 웃기다는 듯이 반응하긴 했지만 사실 부러워하고 있는 제 감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감정 속에 웃고있는 아이네의 앞에서 숨지기 못한 쓴웃음을 짓고있을 때였다. 자연스럽게 내린 스크롤에 들어오는 하나의 동영상. 릴파는 그 동영상 속의 인물에게 눈을 뺏길수밖에 없었다. 영상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은 바로 릴파, 자신이었으니까.

한 유튜브의 링크를 그대로 공유한 글이었다. 누군가 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것을 찍을 듯한 구도였다. 릴파는 전에 불렀던 노래는 다시 부르지 않는 편이라서 무슨 노래를 불렀느냐에 따라 언제 한 버스킹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영상은 가장 최근에 했던 버스킹 때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릴파는 영상이 올라온 채널을 눌러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채널에는 같은 사람을 향한 비슷한 구도의 영상들만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대충 보아도 릴파의 버스킹 영상을 모두 모아놓은 듯 했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뚫어져라 보고있으니 아이네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릴파?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게 아니라, 이것 좀 봐⋯.”
아이네를 향하게 돌린 화면을 보고 휴대폰을 향하던 아이네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언니도 당황했겠지. 금방 다시 움직이는 손은 휴대 전화를 건네받고 스크롤을 내렸다 올리기를 반복했다.
“⋯릴파의 노래가 정말 좋았나보다. 처음 보는거야?”
“응. 동영상 안찾아본지 좀 됐거든⋯.”
“기분은 좀 어때?”

어떠하냐고? 릴파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하는 행동임은 틀림없는데 이런걸 본다면 예전같았으면 당연 바로 기분이 뛰듯이 좋다고 말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묘했다.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마음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당황스러움에 가깝지 않을까. 그래도 분명한 것은 가슴이 뛴다는 것이었다. 비록 무대의 모습은 아니었다. 긴 시간 공을 들여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화려함이 있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릴파는 저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누군가가 노래를 들어주고, 그 모습을 누군가들은 좋아해주는 것으로 릴파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약간은 설렘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있으니 건너편에 앉아있는 아이네의 표정도 묘하게 바뀌었다. 아이네는 릴파가 좋다고 하는 것에 언제나 함께 좋아해주었다. 기뻐하는 일에는 함께 기뻐해주었고, 슬퍼하는 일에는 자기 일인 것 마냥 함께 슬퍼해주었다. 지금은 가슴이 뛰는 릴파와는 조금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의 뿌듯함, 그리고 기특해하는 것 같았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릴파는 상대방의 감정을 잘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sns의 다른 계정으로 인해 릴파와 아이네가 함께 있는 사진이 떠돌면서 릴파를 알아보는 사람이 조금씩 생겼다. 버스킹을 하다가 먼저 릴파가 맞냐며 물어보는 사람이 생겼고, 먼저 릴파의 그룹 이름을 부르며 알아봐주는 사람이 생겼다. 하지만 릴파의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룹으로의 활동에 미래는 아직 어두웠고, 이 그룹을 이끌기 위해 해왔던 것을 앞으로도 해야했다. 하지만 마음은 가벼워졌다. 어쩌면 자신의 이상이 무대 위에 화려함 뿐만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릴파는 계속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행복했고, 그것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기에. 바쁜 일상 속에서도 언제나와 같이 노래를 불렀다.